“고마워. 자네 기사 보고 영화 ‘서울의 봄’이 조선대에서 촬영된 것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조선대를 졸업한 것도 처음 알았네.”
지난해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영화와 조선대의 인 연을 담은 필자의 기사를 본 한 선배가
반기며 한 말이다.
5·18 진상규명에 큰 기여를 한 그는 조선대 출신은 아니지만 조선대 이사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학교에 많은 애정을 쏟아 왔다.
그는 5·18의 아픈 역사가 담긴 조선대를 통해 12·12의 전모가 표현되고,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에 기뻐했다.
영화 덕분이긴 하지만 가히 ‘조선대의 봄’이라 할 만한 시절이다.
기쁨의 저의는 아마 역사의 희생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후손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것에 보내는 작은 헌정일 것이다.
누구라고 다르겠는가. 필자 역시 영화를 보고 습관처럼 실존 등장인물들의 역사를 다시 한번 훑어보다 장태완과 조선대의 인연, 그 인연을 만든 역사의 의미에 몸이 달아 기사를 썼다.
전두환 반란군에 맞서 홀로 벙커를 지키다 전사한 정선엽 병장이 영암에서 태어난 조선대 재학생이었다는 대목에서는 그동안 평범한 이들에 무관심했음을 되돌아봤다.
물론 영화가 비틀린 ‘우리가 남이가’ 패거리 문화를 지적하는 만큼 단순히 동향·동문이라서 관심갖기보다 ‘왜’, ‘어째서’에 더 방점을 두는 것이 고인들의 뜻에 부합하는 길일 것이다.
서울대 못간 육사생도는 엘리트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느그들 서울대 갈 만큼 공부 잘했잖아, 근데 돈 없고 빽 없어서 육사 왔잖아, 근데 똥차들 때문에 아직 별도 못 달고 있잖아. 안 억울해? ”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평소 돈으로 관리한 자신의 하수인 장교들에게 반란을 부추기며 이같이 말한다.
자신들이 육사 4년 정규 과정을 처음으로 이수했다는 자부심의 발로인 동시에 6·25 당시 전장을 누빈 선배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오만함이다.
비록 극중 인물의 입을 통해서지만, 그렇게 말할 만큼 실력은 갖췄을까. 6·25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2년 모집된 육사 11기는 이전 기수 선배들이 전쟁터에서 산화한 것과 달리 전쟁이 끝난 뒤 임관한 첫 세대다.
노태우 회고록에도 나오듯 정규 육사 출신은 경상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육사가 전란을 피해 경남 진해로 옮기면서 인근 지역 출신들이 입교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내 경상도 출신 장교들을 골라 충성서약을 시키고, 선배들에게 뜯어낸 용돈을 나눠주며 사육한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성장한 하나회는 상관보다 ‘나를 알아주는 형님’의 명령에 복종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실력은 어땠을까. 하나회 회원들에게는 따뜻했던 전두환은 베트남전에 파병된 이후 병사들은 마실 물이 없는데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 무기 밀매상으로부터 적의 무기를 구매해 노획물이라고 속였다가 들통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력은 의미가 없었다. 박정희에게 과잉충성하고 군내 사조직의 ‘두목’으로 자리매김해 사실상 후계자나 다름없었다. 반란 수괴가 아니었다면 이기적인 사회생활의 화신으로 주목받을 행보다.
실제로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서울대 에브리타임 게시판에는 이를 추종하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 위기를 맞이하더라도 강력한 리더십 아래 협동하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씁쓸한 글임은 분명하다.
장태완은 전두환과 같은 1931년생 동갑이었으나, 다른 운명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이 1951년 육사에 입학한 것과 달리 장태완은 6·25가 발발한 그 해 19살의 나이로 육군종합학교에 입학, 총알받이 소위로 전장을 누비며 살아남았다.
장태완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에야 비로소 장교 위탁교육 기관인 조선대 법학과에 입학해 못다 이룬 학업의 꿈을 펼친다.
그러나 실력은 의미가 없었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정규 육사 장교들은 육사 이전 ‘갑종 장교’를 멸시하는데, 이는 12·12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장태완이 전쟁을 피해 전두환·노태우와 같이 정규 육사에 입학하고, 그들을 대신해 정규 육사의 전설적인 대표주자로 거듭났다면 기회주의자의 득세를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는 모를 일 이다. 그래 봐야 5·16 군사반란으로 정치적 정당성이 절실했고, 그래서 전두환 같은 기회주의자를 총애했던 박정희 정권의 업보가 있었기에 의미 없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조선대 출신들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 놈들 거기 그대로 있어라. 내가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버리겠어!”
12·12군사반란 당시 자신을 회유하려는 황영시 중장을 향해 장태완은 일갈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표현되듯 노재현 국방장관과 육군 수뇌부가 반란군에 농락당하면서 장태완의 항전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자칭 ‘정규 엘리트 장교’들이 상관을 거역하고 ‘형님’을 따르거나, 보안사의 본분을 잊고 타 부대 지휘관을 감청해 협박하는 하극상과 목불인견의 광경 속 한줄기 군인정신으로 남았다.
비록 세상은 금새 그를 잊고 새로 등장한 권력자의 용안이 번쩍이도록 닦아 광을 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면서 하나회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장태완은 영원히 남게 됐다. 아버지를 화병으로 잃고 아들을 의문사로 잃으면서 하나 남은 딸을 살리려 고개를 낮추고 공기업의 장을 맡기도 했으나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비판한 장태완이었다. 그러나 장태완보다 힘도, 권력도, 지킬 것도 없었으나 원칙 앞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청년도 있다.
영암군 금정면에서 태어난 정선엽 병장은 동신고 재학시절부터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사익보다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라는 ‘무실역행 충의용감(務實力行 忠義勇敢)’의 흥사단 정신을 입에 달고 살던 그였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B2벙커에 있던 후임을 돌려보내고 자신이 근무를 자원하다 군사반란군을 맞이했다.
무장을 해제하라는 반란군의 위협에 정 병장은 “우리 중대장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고 저항하며 공수부대원과 몸싸움을 벌이다 머리에 권총을 맞고 2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그의 행동은 비록 군사반란을 막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의지만큼은 하나회 장교 그 누구보다도 군인다웠다.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정 병장은 오는 2월 조선대학교 명예졸업장을 받게 된다.
조선대의 봄도 그냥 오지 않았다
“황토로라도 담을 쌓고, 창호지로라도 문을 발라, 헛간으로 된 집에서라도 가르쳐서 우리 민족 문화를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장대한 포부와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탄생한 조선대학교가 혼란과 궁핍한 처지를 이겨내고 어느 대학보다 탁월한 교육기관이 되어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기를 기원하니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주십시오.”(조선대학 설립동지회 입회 권유문)
국내 최초의 민립대학인 조선대학교는 해방 직후 유력자들의 기부는 물론 쌀 한 말, 장작 한 짐도 기부하며 ‘우리도 좋은 대학 만들어 보자’던 7만 2195명의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세워졌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만큼 어렵고 간절했던 조선대는 한국 현대사와 마찬가지로 대학 사유화의 어두운 역사를 딛고 학내 민주화의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1대 총장은 쌈짓돈을 내놓았던 7만 2195명의 뜻을 저버리고 각종 학내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다 1988년 1.8항쟁을 통해 물러났다.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시민들까지 나서 113일간의 장기 농성을 한 희생의 대가다.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를 외친 6월 항쟁과 맞물린 조선대 민주화의 역사는 국내 대학 민주화의 표상으로 남았다.
조선대는 교수평의회와 총동창회, 직원노조, 학생회가 참여하는 대학자치운영협의회로 운영되며 민주화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오늘날 학생들이 거니는 캠퍼스는 5·18 당시에는 전두환 계엄군이 침범해 학생들을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았으며, 운동장은 초대 총장의 독재로 아침마다 전 교수들이 모여 구보를 하던 곳이다.
엘리트의 이름이 사리사욕과 조직의 사유화,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시대상 속에서 지방대학의 청년들이 무엇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지는 역사를 돌이켜 볼 일이다. 지난해 치열한 접전 끝에 선출되어 새롭게 조선대의 미래를 책임질 김춘성 총장, 그리고 이하 모든 조선대 구성원들의 의지가 ‘조선대의 봄’을 만개 시키길 기대해 본다.